[백영옥의 '트렌드 샷'] 장보기의 유혹
[조선일보 2007-05-03 13:17]
2년 전, 백화점 식품관과 재래시장을 비교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기획회의 때마다 ‘시장’에 관해서 쓰고 싶다고 우겨대는 내게 편집장이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시장은 사진이 안 나오잖아.” 무조건 시크하고, 멋져 보여야 하는 패션지의 특성상 우리는 대안을 찾기로 했다. 그게 바로 유기농 숍으로 재단장한 모 백화점 식품관과 재래시장을 비교하는 ‘VS’ 기사였다. 일종의 ‘극과 극’ 체험 기사였던 셈이다.
마침 백화점에 취재를 나갔다가 호두 파이를 사고 있던 친한 스타일리스트를 만났다. 잘 됐다 싶어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문가가 보기에 리뉴얼된 후 여기 어때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내게 말했다. “상품 수는 줄고, 동선은 복잡해지고, 가격은 더 비싸졌어요.” 그리고 그녀는 들고 있던 데이지 한 다발을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여긴 무엇이든 예쁘잖아요. 이 데이지처럼.” 그녀는 내게 멋지게 쌓여있고, 조형적으로 진열된 과일을 보면 식욕을 디자인하려는 MD들의 노고가 보인다는 말도 남겼다.
물론 유기농 마켓이 있는 백화점 식품관이나 대형마켓은 쇼핑하기 편리하다. 고기나 생선을 사면 ‘보냉’이 되는 밀폐가방에 넣어주고, 애완견을 들고 가면 ‘케어 서비스’를 신청해 받을 수 있다. 포터가 있어서 짐도 운반해주고, 주차하기도 훨씬 편하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곳이 시장과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일냄새도, 야채냄새도, 하다못해 사람 냄새도 백화점이나 마켓에선 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좋은 냄새도 (더불어 나쁜 냄새도) 나지 않는 이곳이 왜 스타일리시한지 잘 모르겠다. 마치 공간 전체가 랩으로 패킹된 것 같은 대형마켓은 단조롭다. 모두 카트를 밀고, 똑같은 품목의 비슷한 과일과 음식을 사 담고 있는 모습이 어떨 때는 좀 서글프기도 하다.
나이 서른을 넘기고서야 나는 시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장만큼 스타일리시한 곳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잡지사 시절, 레스토랑 담당 기자였던 나는 좋은 레스토랑들엔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바로 계절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근데 재밌는 건 그 계절의 원형이 바로 ‘시장’에 있다는 사실이다. 시장엔 싱싱한 시간들이 찰랑찰랑 고여 있다. 등 푸르고, 팔딱거리고, 쌉쌀한 시간 말이다.
시장의 사계절은 네 번이고, 열 번이고 바뀐다. 그래서 한 바퀴만 돌고나면 지금 나오는 제철 과일과 야채, 곡물들이 무엇인지 전문가처럼 알 수 있다. 콩을 파는 할머니 가게 앞엔 막 까서 올려놓은 초록색 완두콩이 가득하다. 저 동그란 완두를 넣어 밥을 해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완두 옆엔 빨간색 방울토마토가 터질 것처럼 탱탱해 보인다. 그 옆 과일 가게 주인들은 딸기를 파느라 정신이 없다. 그 집에서 키우는 백구는 사람들이 암만 소란스러워도 짖지 않는다. 의젓한 시장 개답다. 재밌는 건 과일 가게 건너편엔 ‘보신탕 집’들도 있다는 것이다. 철창에 갇힌 오리, 닭 옆엔 이미 죽어서 손질된 오리와 닭들도 있다. 이것이 우리 삶 같은 시장의 희로애락이다.
내가 생각하는 시장의 가장 큰 장점은 주차시설이 아주 불편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차를 가져갈 수 없다. 차가 없으니 두 손에 들고 갈 수 있을 정도의 물건만 사게 된다. 딱 그만큼, 먹을 만큼만 말이다. 이게 사람을 얼마나 건강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나는 과일을 냉장고에 넣어 먹지 않는다. 시장에 다니면서부터는 채소도 냉장고에 넣지 않는다. 뭐든 싱싱한 것을 그날 먹을 만큼만 사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열흘 치 씩 장을 보던 때에 내 냉장고는 말 그대로 ‘시체 보관소’ 같았다. 썩은 과일과 시든 야채, 유통기한 지난 치즈들의 무덤 말이다. 생각해 보면 대형마트에서 우리는 얼마나 필요 없는 것들을 많이 사들였나. 시장은 욕심 부리지 말고, 그날 먹을 것만 사가라고 속삭인다. 그런 소박함은 거꾸로 사람을 참 풍요롭게 한다.
시장에 다니면서 단골 가게를 만드는 것도 근사하다. 계란 가게 아저씨는 내게 늘 직접 달걀을 건네준다. 단골인 내게 최고의 달걀을 집어주는 것이다. 그 집에서 산 달걀로 만든 스크램블은 버터를 넣지 않아도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맛을 낸다. 어느 날엔 마켓 말고, 시장에 가보자. 그곳에 가보면 얼마나 그곳이 풍요로운지 단박에 알게 된다. 바람이 부는 날도 좋고, 꽃잎이 날리는 날도 좋겠다.
(소설가)
출처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023&article_id=0000249480§ion_id=103§ion_id2=245&menu_id=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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